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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와 운명, ‘막힌 운(運)’을 여는 개운(開運)❶

운명은 모든 사물을 지배하는 불가피한 필연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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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한 칼럼니스트
기사입력 2020-06-19

▲ 노병한 사주풍수칼럼니스트     © 노병한 칼럼니스트

[노병한의 사주산책] 대부분의 사람들은 출세와 성공을 꿈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만 안타깝게도 누구나 출세하고 성공을 거머쥐지는 못한다. 과연 출세하고 성공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특별한 능력인 팔자=천명(天命)을 갖고 태어난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것일까? 과연 그 진실은 뭘까? 그래서 숙명·천명·운명·소명·입명 등을 구성하는 ()과 운()’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려고 한다.

 

첫째 운명관의 제1형식은 숙명론이다. 이는 운명의 힘을 필연적인 것으로 보고 인간의 존재 모두를 지배하고 있다고 하는 소박한 신앙으로 정립된 관점으로 종교적·철학적인 형태를 띤다. 이는 신()이나 우주지배자의 의지에 따른 결정으로 과거·현재·미래에 걸쳐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숙명론에서는 인간 개개인 자신의 장래를 스스로 전혀 예견할 수가 없다. 그래서 숙명론이 흔히 결정론과 혼동되어 사용되고 있다. 그렇지만 결정론이란 모든 일이 각각의 원인에 따라 일정한 조건 아래서는 반드시 일정한 결과를 가져오도록 결정되어 있다고 하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이론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숙명론에서는 예견이 가능하며 예외적인 현상의 발생이 인정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숙명론은 결정론이나 그에 대한 비결정론은 오히려 운명이 어느 정도 발전된 단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이런 숙명론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는 미()개인이나 아니면 고대민족의 신화나 전설 등에서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그리스의 신화에서 보이는 운명과 관련된 운명의 여신은 3명의 모이라이(moirai)인데 각각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의 탄생을 관장하여 생명의 실을 짜내는 클로토(Clotho)

둘째 인간의 생애를 마음대로 다루는 라케시스(Lachesis)

셋째 인간의 생명줄을 끊고 죽음으로 몰아가는 아트로포스(Atropos)

 

이와 같은 운명신과 관련된 신화는 게르만신화나 바빌로니아신화 등에서도 나타난다. 이같이 미개인이나 고대민족에서는 운명의 힘을 의인화하는 경향이 많았다. 이런 소박한 신앙은 원시공동체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소박한 운명의 신을 신앙하는 폴리스가 해체로 접어들었을 때에 비로소 합리적 정신에 기초한 신화의 수정이 시작된다.

 

플라톤 이전에 운명을 고찰한 철학자로서는 헤라클레이토스가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우주의 생성과 발전을 일정한 로고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필연적 운명을 깨닫고 그것에 따르는 것이 이성적이며 최선이고 행복이라고 했다.

 

한편 스토아파도 우주는 로고스에 의해 지배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로고스는 운명인 동시에 모든 것을 합목적적으로 형성하는 이성적인 섭리라고 인식했다. 소우주로서 인간의 본질은 우주의 본질인 로고스와 동일하기에 이성에 따라 일어나는 일이 바로 로고스에 따라 일어나는 일이라 여겼다.

 

이렇게 모이라이(moirai) 이외의 다른 관점에서 운명의 관념을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바로 플라톤 이후의 일이다. 그래서일까? 이런 소박한 신앙이 공동체가 해체되고 개인의 독립성이 자각되고 강조되는 중세 이후에 비로소 철학과 신학 등으로 승화하기에 이르렀다고 해야 할 것이다.

 

둘째 운명관의 제2형식은 결정론이다. 이런 운명에 대한 결정론은 인간의 의지와 행위를 결정하는 힘을 정신적인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물질적인 것으로 보느냐에 따라 크게 2가지의 종류로 나누어진다고 할 것이다.

 

우선 인간의 의지와 행위를 결정하는 힘을 정신적인 것으로 보는 운명관의 관점은 그리스도교의 구제예정설이나 근세유럽의 관념론 등이다. 다음으로 인간의 의지와 행위를 결정하는 힘을 물질적인 것으로 보는 운명관의 관점은 고대의 데모크리토스로부터 근세자연철학에 이르는 유물론이나 마르크스주의로 대표되는 변증법적인 논리 등이다.

 

초기에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교의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그래서 아담의 죄를 공유하는 인간의 원죄로 인해 영원성의 소멸로 인간의 운명이 규정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구세주인 예수만이 이 상태를 최종적으로 구제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구제예정설 논쟁으로 발전한 것은 사도 바울이 그 기원이다. 바울은 구약시대에 있어서 신()의 섭리와 신약시대에 있어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제를 연결시킴으로써 현세의 존재나 사건을 전지전능한 신()에 의해 규정된다고 했다.

 

더 나아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담에 의한 원죄를 공유하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도덕적으로 무력하여 구원은 신()의 의지에 의한 일방적인 선택에 맡겨져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신()의 은혜라는 측면을 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선택받지 않은 자에 대해서는 깊게 논하지를 않았다. 다시 말해 구원에 대한 예정만 언급되어 있고 멸망에 대한 예정의 언급은 없었다.

 

구원과 멸망이라는 이중예정설을 설파한 사람은 바로 16세기의 종교개혁자 칼뱅이다. 그는 구원만이 아니라 멸망도 신()에 의해 사전에 예정되어 있어 어떠한 선행을 통해서도 이를 바꿀 수 없고 사람은 단지 신()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러한 이중예정설의 귀착점은 바로 인간의 구원에 대한 절망이다. 그러나 칼뱅은 개인은 스스로를 선택된 자라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역설했다. 그래서 자기 확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각자의 직업에서 끊임없이 노동을 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중세 이래의 수도원적인 금욕은 바로 세속적인 금욕인 직업노동과 검약으로 대치되게 이른다.

 

한편 17세기의 스페인의 신비신학자 미겔 데 몰리노스는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교회의 일이나 개인의 윤리적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신()으로 향한 명상과 자기포기에 의해 신()의 섭리를 받아들인다고 하는 수동적인 불()활동을 철저히 지킬 것을 역설한다. 이 사상은 1687년에 이단으로 배격되었지만 오히려 루터파의 경건주의에 영향을 준다.

 

이러한 숙명론과 결정론은 불교의 인과응보나 이슬람교를 포함하여 일반적으로 인간에게 죄악을 저지를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비()결정론적인 요소가 들어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근세의 관념논리학, 스피노자의 합리적 결정론, 라이프니치의 예정조화설, 칸트 및 신칸트파의 목적론적 결정론, 과학적 결정론 등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근세 유럽에서는 자연과학의 발전과 휴머니즘 사상의 보급으로 인해 특기할 만한 운명론은 없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나타난 니힐리즘은 새로운 운명관으로 주목된다. 19세기 후반 이전의 신학적 예정설은 신() 혹은 절대자의 존재를 전제로 하였다. 이렇게 니체로 대표되는 근대의 니힐리즘은 그에 대한 안티테제였다. 니체는 운명을 적극적으로 긍정한 대표적인 사상가였다.

 

셋째 운명론의 사전적인 의미를 보자. 인간의 의도나 일을 포함하는 우주전체가 인간의 자유의지와 관계없이 움직이기 어려운 궁극적인 결정에 의해서 규제되고 있다고 생각할 때에 사람이 지각할 수 없는 즉 초월한 힘을 운명이라고 말한다.

 

운명은 모든 사물을 지배하는 불가피한 필연의 힘이다. 그래서 누구라도 따를 수밖에 없고 예측하기 힘든 절대적인 힘이다. 운명은 명확한 목적의지를 갖는 합리적인 힘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비합리적이자 초()논리적인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라고 봄이 바를 것이다.

 

그러나 초()논리적인 힘은 그 자체로서는 결코 운명이라 할 수 없다. 운명의식이 처음으로 인간에게 나타남은 불가항력적인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을 때이다. 불가항적인 일에 대처하기 위한 합리적인 처리요구에 따라 도출되는 것이 운명의식으로 굳어진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운명은 인간적인 극한 심리현상으로 어느 시대의 사람들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운명이 신격화되어 신앙과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추상화되어 신학과 철학의 주요한 의제가 되어왔음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런 초()논리적인 힘이나 운명법칙을 예측하고 예견하기 위해 동서양에서 신탁·점성술··역학·사주명리·상법인 관상·풍수 등의 다양한 주술적인 방법들이 구축되어왔다.

 

운명의 힘이 다양한 형태로 인간에게 다가와 나타날 수 있다. 그러한 것들에 대한 인간의 이해에는 공통된 틀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운명관으로 정립되게 되는 동기를 이루는 것들이다.

 

네 번째로 명()론을 구성하는 숙명(宿命천명(天命운명(運命소명(召命) 등이 있다. 우주 삼라만상을 형성하는 자연의 섭리는 아주 명쾌하다. 자연의 섭리는 바로 명()이라는 것이다.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은 뿌리(((열매()라는 근묘화실(根苗花實)의 성장과정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며 순환하는 생명체임이 분명하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동물도 역시 출생(늙음(질병(죽음()이라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과정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며 진행해가는 생명체임이 확실하다. 이러한 생명체를 줄여서 우리는 명()이라고 말한다.

 

()이 새롭게 시작해 출발함은 생명체의 생성이고 출생이며 삶의 시작이다. 이러한 명()이 다함은 죽음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명()은 생명체의 씨앗이고 종자라 할 수 있다.

 

()에는 크게 숙명(宿命천명(天命운명(運命소명(召命) 등이 있다. 그래서 우주의 만물과 인간의 세상사에는 숙명·천명·운명·소명이라는 4가지가 언제나 함께 작용하고 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숙명·천명·운명·소명은 따로 떨어져 따로 움직이며 작동을 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사슬로 함께 같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전생의 업보(業報)가 현생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데 영향을 미치고, 또 현생의 업보가 내생의 운명을 결정짓는데 영향을 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우주와 자연의 질서는 매우 엄격하기 때문에 명()을 가진 생명체에게 교만함을 용납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직 봄(天時)에 이르지 않았는데 씨앗을 뿌린다고 싹이 트일 이가 없음이 자연의 법칙이자 자연의 순리이다.

 

우리가 주변에서 늘 보듯이 때를 못 맞추어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자연의 순리인 섭리, 매사 때(天時)를 알고, 그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것이 바로 도()의 출발점이자 경계선이라 할 것이다.

 

()은 천자(天子)의 명령처럼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존재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옛 사람들은 인간사에서 부딪치는 부귀와 귀천, 길흉과 화복의 모두가 명()의 범주에 든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게 과연 명()이라고 단정해 정의할 수 있을까?팔자와 운명, ‘막힌 운()’을 여는 개운(開運)에서 계속nbh1010@naver.com

 

/노병한:박사/한국미래예측연구소(소장)/노병한박사철학원(원장)/미래문제·자연사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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